bordermolokai image칼라우파파의 성 필로메나 교회

세인트 다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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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카이의 칼라우파파에는 가슴 아픈 사연과 헌신적인 봉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800년대 후반 하와이에 한센병이 만연했습니다.  질병에 대한 이해 부족과 그 밖의 요인으로 인해 환자들은 강제로 외딴 칼라우파파 반도로 추방되었습니다.   20세기에 걸쳐 많은 교회 목사와 카톨릭 신부 및 모르몬교 장로를 비롯해 환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몰로카이 섬에 와서 봉사했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고립된 죽음의 장소가 서서히 치유의 안식처로 변모했습니다.  헌신적으로 노력한 많은 봉사자 가운데 성 다미엔 신부와 성 마리안느 코프 수녀는 환자들의 사랑을 받은 수호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세인트 다미엔은 지금의 칼라우파파 국립역사공원이 있던 곳에서 나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섬기며 16년 동안 헌신한 성인이었습니다. 1840년 벨기에 태생인 요셉 드 베스테르는 선교 사역을 위해 1864년, 오아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평화의 성모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세례명을 다미엔으로 하였습니다. 이 대성당은 미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로마 카톨릭 성당으로 아직도 호놀룰루에 남아 있습니다.

세인트 다미엔은 하와이 빅 아일랜드에서 8년 동안 사역했는데 어느 날 몰로카이에 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줄 신부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칼라우파파 정착지는 삼면이 태평양 바다로 둘러싸이고 뒤로는 해안 절벽이 막아 서 몰로카이와 단절된 지형으로, 1866년부터 1969년까지 나병환자들을 강제로 유배시킨 곳이었습니다. 33세의 나이에 다미엔은 이 외딴 반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믿음을 실천하고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오아후로부터 재원과 의료 서비스를 조달하는 일을 관장하는 한편 환자들이 집을 짓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돕고 섬 내 수계 시설을 만드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교단과 하와이 정부에 강력한 요구를 했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은 나병과 나병환자에 대한 세계의 인식을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초인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주었고, 환자들을 최대한 존중하고 치료해 주었으며, 하와이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무욕과 연민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환자들과의 잦은 접촉으로 인해 그도 나병에 감염되었습니다. 1889년, 세인트 다미엔은 그가 그토록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바로 그 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거의 90년이 지난 1977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가 성자 신분의 첫 단계인 가경자임을 인정했습니다. 2009년 10월, 다미엔 신부는 로마에서 의식을 거쳐 성자 칭호를 부여 받았습니다. 칼라우파파에 있는 동안 그가 섬겼던 사람들의 자랑스런 후손들이 그의 정신을 이어갈 것입니다.

1980년에 조성된 칼라우파파 국립역사공원은 연중 무휴이지만 투어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TEXT] 그곳에 가면 세인트 다미엔과 그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배울 수 있겠지요. 공원 기념물 중에는 성필로메나 성당이 있는데, 다미엔이 사제생활을 했고 처음에 묻혔던 곳입니다. 1864년 그가 처음 하와이에 도착했던 오아후에는 세인트 다미엔의 동상이 다운타운 호놀룰루의 주청사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국립 동상 기념관에 가면 카메하메하 1세 동상과 더불어 그의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